박스권에 갇힌 국내 증시 대신 해외주식에 눈을 돌리는 투자자가 갈수록 늘면서 올해도 기록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 증시에 대한 쏠림이 더욱 뚜렷해지고, 성장성이 높은 정보기술(IT) 분야 투자 추세가 공고화되고 있다. 투자금액 상위 종목에선 1위가 미국 아마존에서 일본 골드윈으로 바뀌는 등 자리바꿈이 활발했다.
15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14일까지 국내 투자자의 해외주식 거래(결제)금액은 316억2055만달러에 이른다.
이 기간 평균 원/달러 환율로 계산하면 3조6331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최근 증가세를 고려하면 지난해 쓴 사상 최대 기록(325억7042만달러) 경신도 유력하다.
해외주식 투자 성장의 일등공신은 단연 미국이다. 미국 주식 거래금액은 234억1161만달러로 75.2%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해(69.0%)보다도 크게 늘었다. 미·중 무역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증시가 18.3%(S&P500 기준) 성장하며 글로벌 투자자들을 빨아들인 덕이다.
반면 2위 홍콩 비중이 16.1%에서 12.5%로, 일본은 5.3%에서 4.5%로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중국(4.7%)이 일본을 누르고 3위로 올라섰다. 동남아 투자 선봉에 있던 베트남(2.3%→1.3%)은 주춤했다. 위험자산 회피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신흥국 투자심리가 다소 위축된 영향으로 보인다.
국내 투자자들의 투자 상위 종목에서는 순위 경쟁이 치열했다. 선두에서 독주했던 미국 아마존이 1위 자리를 일본 상장기업 골드윈에 내줬다. 전일 기준으로 국내 투자자의 골드윈 주식 보관금액은 6억6440만달러로, 지난해 말보다 무려 2억1506만달러 늘었다. 아마존은 지난해 말 7억354만달러에서 현재 6억6182만달러로 줄어든 상태다. 골드윈은 노스페이스의 아시아 판권을 보유한 업체로, 아웃도어·스포츠 의류 성장에 따른 실적 개선과 주가 상승에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아마존이 한 계단 내려오기는 했지만, IT 관련주의 선전은 지속되고 있다. 작년 말엔 10위권 밖에 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2억8577만달러로 4위에 올라섰고,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2억6849만달러)은 6위에서 5위로 순위가 상승했다.
또 홍콩에 상장된 중국 대표 IT 기업 텐센트가 7위(2억3279만달러)로 10위권 안을 지켰고, 네이버 일본 자회사인 라인도 10위(2억1922만달러)로 순위권 안을 유지했다.
클라우드 등 4차산업 관련 기업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인 글로벌X 클라우드가 출시 6개월 만에 8위에 이름을 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글로벌X 클라우드는 미래에셋자산운용 미국 ETF 운용사인 글로벌X가 지난 4월 상장시킨 상품이다.
반면 지난해 말 4위였던 일본의 철강기업 신일본제철은 5292만달러의 투자금액이 날아가며 9위(2억1980만달러)로 내려왔다. 7위였던 알리바바와 10위 핑안보험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미국에 상장된 알리바바는 창업자 마윈이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이슈가 있었다.
중국 인터넷기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BAT’라는 조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이두(Baidu), 알리바바(Alibaba), 텐센트(Tencent)의 앞글자를 딴 중국 3대 인터넷회사의 약칭이다. 지난 9월 말 기준 알리바바와 텐센트의 시가총액은 각각 4350억달러와 4018억달러였다. 바이두는 358억달러로, 이들과 격차가 크다. 한때 중국 인터넷기업 시가총액 1위였던 바이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0년으로 돌아가보자. 바이두의 중국 검색엔진 시장점유율은 63%로 1위를 지키고 있었다. 구글이 33%로 2위를 차지했다. 양강 구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 정부의 인터넷 검열로 2010년 4월 구글은 중국 시장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정부의 지지를 얻은 바이두는 사실상 검색엔진 시장을 독식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었다.
바이두의 시가총액은 1년 반 만에 240억달러에서 400억달러로 급증했다. 같은 시기 텐센트의 시가총액은 385억달러에서 370억달러로 감소해 시가총액 1위 자리를 바이두에 넘겼다. 2011년 텐센트의 주가 부진 시발점은 ‘리그오브레전드(LOL)’의 중국 진출이었다. 이전까지 회사의 가장 큰 수익원이던 ‘던전앤파이터’와 ‘크로스파이어’에 비해 영업이익률이 낮다는 게 이유였다. 바이두는 ‘피닉스 네스트’라는 새로운 검색 시스템을 도입해 수익화를 극대화했다. “검색 결과와 광고가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비난에도 회사 매출은 꾸준히 증가했다. 2015년 희귀암을 앓던 한 대학생이 바이두 검색광고에 속아 목숨을 잃는 ‘혈우병 게이트’가 발생했다. 바이두 주가는 폭락했고 회사는 큰 위기를 맞는다. 허위 의료광고 등 유해정보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던 바이두는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전체 매출에서 15~25%를 차지하는 의료광고를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바이두는 모바일검색 진출과 인수합병(M&A)을 통해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게임과 온라인상거래 분야에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독보적인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텐센트와 알리바바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2017년 바이두는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 임원을 거친 루치를 총재(COO)로 영입했다. 루치는 바이두에 합류한 이후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전략을 통해 회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주가는 한때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불과 1년 만인 2018년 5월 루치의 사임 소식으로 바이두 주가는 이틀 동안 14% 하락하며 137억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한다. 결과적으로 경쟁의 부재가 바이두에는 독이 됐다. 매너리즘에 빠진 기업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바이두가 고전하는 동안 온라인상거래업체 제이디닷컴, 핀둬둬 등의 시가총액은 바이두를 넘어섰다. 틱톡으로 유명한 비상장업체 바이트댄스의 예상 시가총액도 바이두를 앞질렀다. 더 이상 BAT는 옛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